인간과 인성

고전을 바탕으로 인간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숙고하고자 합니다

엔네아데스 해설
플로티노스 지음/ 조규홍 옮김

대한민국. 서울,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5



오늘날 ‘아름다운’에 대한 판단은 실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만큼 난해하다. 특히 인터넷 시대를 맞아 과거에 비해 더 더욱 잦아지는 소위 ‘예술’과 ‘외설’의 시비 문제든 예술적 패러디와 저작권 침해의 법적 공방이든 그로부터 우리가 경험하는 미적 판단은 점점 더 상대주의적인 입장으로 굳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아예 아름다움에 대한 객관적 판단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원숭이의 장난이 썩 괜찮은 작품이 될 수 있다면, 도대체 예술은 무엇하러 존재하는가? 
하나의 사물을 작품으로 만들어 주는 게 ‘이론’이라면 예술가들은 왜 존재하는가? 
보드리야르는 <르 몽드지>와의 인터뷰에서 ‘현대 미술은 무가치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 예술 중에 그것을 둘러싼 액자 값을 하는 게 얼마나 될까? 그런데 왜 무가치한 것이 그렇게 높이 평가되고, 높은 가격에 팔리는 것일까?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공모’의 결과다.”

현대에 널리 유포된 이 같은 상대주의적인 입장, 심지어 예술 자체의 순수성만을 고집해야 한다는 입장을 우리는 어느 선까지 수궁해야 할까? 
더 이상객관적인 미적 판단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같은 맥락에서 플로티노스의 ‘아름다움에 관한 논의’는 분명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먼저 이 책에 실린 (Enn.Ⅰ.6:아름다운 것에 대하여)는 ‘아름다움’을 주제로 한 플로티노스의 대표 작품이다. 이에 플로티노스 연구자들은 또 하나의 작품 (Enn.Ⅵ 7: 정신세계의 다수성 및 그에 따른 선에 관해)를 추가하여 아름다움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중요한 작품으로 취급한다. 
상기 두 작품 (<Enn.Ⅰ6> 과 <Enn. Ⅴ 8>을 읽어 나갈 때 최소한 다음과 같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예컨대 플로티노스는 ‘아름다움’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그가 자신의 입으로 플라톤(Platon)의 사상을 그대로 전달하고 해석하는 자임을 스스로 밝혔다 하더라도 미적 판단에서 플로티노스와 플라톤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최소한 두 인물의 생존 시기가 약 600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갖는 한 그로부터 초래되는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매우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피타고라스학파가 도입하고 플라톤(<티마이오스>, 66a, 69b 87c) 및 아리스토텔레스가 채택했던 개념이었고, 나중에 스토아학파 또한 계승한 ‘비례관계 [symmetria (좌우대칭/균형)]’가 –스토아 학파는 색채도 추가했음!- 무엇보다도 도마 위에 오른다. 
플로티노스는 그와 같은 물질적 복합체에 대한 미적 판단에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비례관계는 비록 아름다운 “형상”에 대한 다양한 표현의 하나이긴 하지만, 복합체가 아닌 정작 ‘순수한 것’, 나아가 ‘정신적인 존재’에 대한 미적 판단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물질적인 아름다움의 기초가 되는 정신적인 아름다움에 관심을 기울여야 바람직할 것이요, 나아가 그런 정신적인 모든 아름다움을 알아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분명 플로티노스에게서도 플라톤의 경우처럼, 미(美)는 선(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선의 이데아”는 곧 ”아름다움의 이데아“ 이기도 하다.
예컨대 “오히려 [참되게] 존재하는 것이 미(美)요, 그와 다른 모습이 추(醜)다. 그것이 또한 첫 번째 악(惡)이다. 
그래서 그곳(존재)에서는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 혹은 선과 미가 동일하게 보인다.” 그래서 만일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적인 바람으로서 당연하다면, 그것은 우리 존재의 자기실현으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 어떤 영혼도 만일 스스로 아름다움에 관계하지 못한다면, 아름다움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신과 미를 직관하고 싶다면, 먼저 온전히 신과 같이 되고자, 또 온전히 아름다워지고자 애써야 한다. 한마디로 존재의 실현이 관건이다. 
이것이 플로티노스의 미학에 관한 철학적